갈릴레오와 열에 대한 인간의 이해! 오늘은 온도계는 누가, 왜 처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감각에서 숫자로, ‘열’을 다루는 인간의 진화
“오늘 기온은 27도입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현대인을 위한 정보일 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위대한 도약을 상징합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변화를 숫자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 그것이 바로 온도 측정이라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이 자명해 보이는 행위는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과학적 개념이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더위와 추위를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각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같은 방에서도 어떤 사람은 춥다 하고, 다른 사람은 덥다고 느끼기도 하죠. 의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환자의 몸이 ‘뜨거워 보인다’고 해서 열이 있다고 판단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온도를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처음으로 도전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입니다. 그는 관찰과 실험의 힘을 믿었던 과학혁명 시대의 선구자였고, 자연의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량화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했던 인물이었죠.
이 글에서는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온도계’가 언제, 왜, 어떻게 등장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학의 역사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깊이 있게 다뤄보려 합니다.
갈릴레오의 열기계 — 온도계를 향한 첫걸음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이탈리아 피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수학자, 발명가였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기여 중 하나는 바로 ‘온도’를 측정하려는 실험 도구의 개발이었습니다.
1600년대 초반, 갈릴레오는 유리관과 구체를 이용해 공기의 팽창과 수축에 따라 물의 위치가 변하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열기계(Thermoscope)’로 불리는, 온도계의 전신입니다. 이 장치는 온도가 오르면 공기가 팽창하여 물을 밀어내고, 식으면 공기가 수축해 물이 다시 올라오도록 만든 구조였죠.
이 장치는 수치나 눈금이 없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온도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온도 변화를 시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덥다, 혹은 실내가 실외보다 따뜻하다는 비교가 가능해진 것이죠. 이는 인간이 자연의 상태를 수치 없이도 기계로 감지하려 한 첫 시도였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열기계가 단지 과학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귀족들이나 의사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방이 가장 따뜻한지, 와인을 어디에 보관하면 가장 적당한지 등을 알아보는 데 활용되었죠.
하지만 갈릴레오의 열기계는 실용성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주변 기압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고, 숫자로 온도를 측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장치는 온도계를 향한 출발점에 불과했지만, 이후 과학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남깁니다.
온도를 정량화하라 — 파렌하이트, 섭씨, 그리고 측정의 전쟁
17세기 중반부터 과학자들은 갈릴레오의 열기계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돌입합니다. 이들은 열의 측정을 단지 상대적인 변화가 아닌, 정확한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를 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인물이 바로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Daniel Gabriel Fahrenheit)입니다.
1714년, 파렌하이트는 세계 최초의 수은 온도계를 개발합니다. 수은은 액체이면서도 일정한 온도 범위 내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팽창하고 수축하기 때문에, 온도 측정에 매우 적합했습니다. 이전에 사용되던 알코올은 증발하거나 끓는점이 낮아서 부정확했죠.
파렌하이트는 나름의 기준을 정해 온도 척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0°F를 염화암모늄과 얼음의 혼합물이 이루는 가장 낮은 온도로 설정하고, 96°F를 건강한 사람의 체온으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씨(Fahrenheit) 척도는 주로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반면, 스웨덴의 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Anders Celsius)는 1742년에 또 다른 체계를 제안합니다. 그는 온도 측정을 보다 직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만들기 위해 물의 어는점을 0도, 끓는점을 100도로 설정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 척도는 바로 섭씨(Celsius) 단위죠.
재미있는 건 셀시우스가 처음에는 지금과 반대로, 끓는점을 0도, 어는점을 100도로 정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죽은 뒤 이 척도가 뒤바뀌면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온도계의 발전은 단순한 장치의 개선을 넘어, 수치와 기준의 논쟁이었습니다. 과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도구와 개념이 함께 진화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열의 본질을 묻다 — ‘칼로릭’에서 분자 운동까지
온도계를 만들기 위해 과학자들은 단순히 물리적 장치만이 아니라, ‘열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도 맞서야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열을 ‘불의 원소’로 보았고, 이후 수세기 동안 이 개념은 이어졌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중 하나가 칼로릭(Caloric) 이론입니다. 이는 열을 마치 물처럼 흐르는 무형의 물질로 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어떤 물체가 뜨거워지면 칼로릭이 그 안으로 흘러들어갔고, 식으면 빠져나간다고 여겼죠.
이 이론은 오랫동안 지지를 받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결정적인 반례에 부딪칩니다. 물리학자 벤저민 톰슨(럼포드 백작)은 대포를 깎는 과정에서 생기는 엄청난 열을 관찰하면서, 칼로릭 이론이 모순임을 증명합니다. 열은 마찰로 계속 생성되었고, 이는 마치 에너지의 한 형태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열은 분자들의 운동 에너지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뜨겁다’는 것은 그 물질의 분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고, ‘차갑다’는 것은 분자 운동이 느리다는 것을 의미하죠. 이 이론은 열역학의 탄생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온도계는 바로 이 분자 운동의 수준을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운동을 수치로 끌어내는 이 작은 장치는, 인간이 감각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도전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수은 한 방울 속에 담긴 과학혁명의 정신
온도계는 단지 실험실에 있는 유리기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의 정신, 즉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인류의 노력을 상징하는 기호입니다.
갈릴레오가 만든 열기계에서 시작된 여정은, 파렌하이트의 수은 온도계와 셀시우스의 물 척도를 지나, 오늘날 기상 위성과 스마트 체온계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은 ‘열’이라는 보이지 않는 물리량을 측정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의료, 산업, 환경 등 수많은 분야에서 혁신이 가능해졌습니다.
온도계 하나의 발명은 곧 세계에 대한 시선의 전환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지 ‘덥다’ 혹은 ‘춥다’라고 말하는 대신, 숫자로 자연을 대화합니다. 그것은 인류가 감각에만 의존하던 시절을 벗어나,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온도계는 과학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한 도구,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수치화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끝에 도달한 놀라운 통찰.
그 모든 것이 이 작은 유리관 속에 담겨 있습니다.